본문 바로가기

이슈흥미

아버지 부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을 회상하며

반응형

아버지 부시라고 불리는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향년 94세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입니다.


클린턴,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정제계 인사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아버지 부시인 조지 H. W부시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생애



조지 부시 대통령은 1924년 6월 12일 매사추세츠 주 밀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IB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코네티컷 주의 상원의원을 10년이나 지내기도 했습니다.


부시는 코네티컷 그레니치에서 성장했는데요.


뉴욕의 위성도시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동네입니다.


이후 미국의 최고 보딩스쿨이라고 하는 명문 필립스 앤도버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예일대에 들어간 부시는 바바라 피어스와 약혼을 했는데요.


평범한 청년이었던 부시가 18살이되던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부시는 예일대 입학을 미루고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전투기 파일럿으로 군복무를 시작합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부시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섬을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격추를 당한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요.


이는 일본을 극도로 싫어하고 반일본 정책을 펴는 계기가 됩니다.


1945년 약혼자였던 바바라와 결혼하고 종전이 되자 다시 예일대 학생으로 복귀합니다.


아버지 부시의 정치활동


59년도 공화당에 입당으로 정치에 입문하는데요.


1966년 텍사스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이후 1970년 상원의원에 도전했으나 로이드 벤슨 의원에게 패하여 정계를 떠나는 듯했는데요.


1971년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 임명되어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합니다.




하원의원시절 닉슨 대통령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는데 이것 덕분이라는…


이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CIA국장을 지내며 정치적 기반을 다져 갑니다.


유엔 미국 대사와 CIA 국장을 지내면서 정치와 행정 그리고 외교에 관한 전반적인 경험을 쌓게 되는데요.


이런 경험들은 추후 냉전 종식과 걸프전 등 격변의 시기에 미국을 잘 이끌어 나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커리어를 쌓아가던 아버지 부시는 닉슨 대통령 시절인 1981년 부통령에 지명됩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아버지 부시가 닉슨 대통령 재임기간인 8년 동안 부통령을 지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요.


아버지 부시가 20세기 들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1988년 미국 선거에서 당선하여 제 41대 미국 대통령에 오르게 되는데요.


당시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에서 17%나 밀리고 있었지만 단골 메뉴인 사형제도를 이슈로 끌고 나와 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선거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네거티브전으로 뽑히기도 합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업적



아버지 부시는 대통령으로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큰 업적은 90년대 냉전을 종식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불과 4년의 재임기간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몰락하는 등 대격변을 겪었는데요.


소련이 무너지고 걸프전에서 효율적인 군사작전으로 통해 미국을 그야말로 초일류 국가의 반열에 올려 놓습니다.


당시 미국의 위상은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된 시기이기도 하죠.


덕분에 미국 내에서 지지율이 80%까지 치솟기도 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와도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92년 방한하여 국회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퇴임 후에도 2번이나 방문했습니다.


또한 정치적인 선경지명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기도 합니다.


소련이 몰락하기 직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많은 구소련의 국가들이 독립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미국이 지원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부시는 이러한 연설을 합니다.


“미국이 멀리 있는 소련을 없애자고 우크라이나의 독재자를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독립을 원하는 우크라이나는 이 부시의 연설을 비판하여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연설을 하게 된 배경이 드러났는데요.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이 미국의 지원을 믿고 소련에 무모한 행동을 하면 소련의 제압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대참사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사실.


이런 참사를 방지하고자 일부러 그런 연설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시의 판단은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하면서 맞았던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냉전종식, 걸프전에서의 승리와 같은 업적으로 재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많았는데요.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면 다른 동맹국들은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 걸프전 당시 부시의 발언


부시 대통령의 재임 실패


하지만 90년대 미국의 경제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는 일본에 밀리면서 많은 산업들이 후회하여 성장침체기를 겪었던 것.


클린턴은 경제문제를 끊임없이 이슈화하였고 부시 대통령은 결국 재선에 실패하게 됩니다.


부시 대통령 사망



부인 바바라가 7개월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30일 밤 향년 94세로 사망했는데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거의 A4 용지 한 장을 빼곡히 채운 애도문을 개재하여 애도를 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트위터를 통해 애도를 표명했으며 지미 커터, 버디 샌더스, 조 바이든, 폴 라이언 등과 같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사들은 모두 애모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반응형